-오라버니.

“헉.”

가녀린 음성을 끝으로 자의에 반하여 왕은 금침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초가 녹는 소리만이 들리는 야심하고 고요한 밤중. 축시쯤이나 되었을까. 또다시 같은 꿈을 꾼 것이다.

“자리끼를 내어오라.”

“예, 전하.”

젊은 임금의 넓은 등이 그만 축축하고 흥건하였다. 자리끼를 내미는 상궁의 얼굴에 자연히 긴장이 어렸다. 옥체 미령 하신가. 흉몽이라도 꾸셨는가. 용안을 살피기 바쁘다.

자리끼를 받아 든 왕이 게를 마시다 말고 그릇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사기그릇에 담긴 투명한 물 위로 꿈에나 그리던 여인의 얼굴이 어른어른 비치었다. 간밤의 꿈자리에도 다녀간 어여쁜 이가 아련히 수면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자아, 목이라도 축이고 하셔요. 저가 오라버니 드리려고 새로 길어왔지?”

방긋방긋 웃으며 쪽 바가지를 내미는 얼굴이 해사하니 귀여웠다. 부모를 여의고 혼자 지내는 마을 처녀 봉이에게는 본디 이름도 성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강보에 싸여 버려진 계집아이를 강화 마을 아낙들이 십시일반 젖을 주어 키웠다 한다. 사정이 딱하기로는 역적의 자손이라 강화의 촌구석으로 유배를 넘어온 원범 또한 매한가지인데, 그는 이 천애고아 소녀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저의 것과 함께 땔감을 해다 주기를 한 해 두 해 되다 보니 그만 소리 없는 정이 담뿍 들어버렸다.

“방에 들어가. 볕이 뜨겁네.”

“오라버니가 이리 고생하는데 어찌 저가 탱자탱자 논단 말이요?”

원범이 구슬땀을 내며 장작을 패는 동안 그녀는 좀처럼 곁을 떠날 줄 몰랐다. 말로 다 하지 않아도 실처럼 이어지는 마음. 햇살이 따갑고 땀이 쏟아져도 짜증하나 날 줄을 모른다. 그저 함께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나누고, 그래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처녀총각이다. 세상이 세상인데 남녀가 유별함이 이제는 어디 있다 할 것이며 그렇다 할 신분들도 아니었다. 역적의 자손과 천민 처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밑바닥의 사람들. 돌에 치일 듯 흔하고도 평범한 청춘 백성 둘은 머잖아 당골 할 멍에게 기일을 받아 철륭에 물을 떠놓고 소박히 둘만의 혼인을 치르기로 약조하였었다.

“나는요, 해가 밉소.”

“왜? 해가 있어야 곡식이 익지.”

강화로 유배를 온 몇 년 사이에 농사꾼이 다 되어버린 원범이 다그쳤다. 다부진 가슴팍의 그을린 피부 위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들을 봉이가 훔쳐 닦아 주었다. 두 뺨이 그만 붉다.

“그냥. 오라버니, 등목 하여 드릴까?”

“또 저번처럼 고쟁이까지 다 적셔놓게?”

원범이 다정히 그녀의 콧잔등에도 맺힌 땀 이슬을 걷어내 주며 장난 어린 핀잔을 주었다.

“아니여요!”

펄쩍 잡아떼며 종달새 같은 웃음을 터트리던 봉이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멀리서 말 달려오는 소리와 색색의 깃발이 흩날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관군이 장마 전의 개미 행렬모냥 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두 남녀의 운명을 가혹히 찢으러 오는 화마의 행렬이었다. 틀림없이 역적의 씨를 말리려 오누나. 봉이가 아연실색하여 저의 정인을 숨기느라 혼비백산으로 정신이 없었다. 원범도 놀라 봉이의 손을 잡고 뒤꼍으로 도망하는데, 구름 떼처럼 몰려오는 관군에 금세 붙들리고 말았다. 한데 금위장의 말이 가관이로다. 조선의 해가 되란다. 임금님 뫼시러 왔단다. 천지가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원범은 그렇게 또 다른 약조를 그녀에게 짓고선 강화를 떠났다. 꼭 데리러 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루아침에 어인 날벼락인가.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만이 그렁그렁하여 고개를 끄덕이던 봉이의 얼굴은 그가 마지막이었다. 철옹성 같은 궐문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열리지 않았다.

사무친 그리움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왕은 생각하였다. 법도, 법도, 매일이 엄중한 법도 속인데 동으로 가도 서로 가도 무조건 그는 틀리고 옳지 않다 하였다.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이 처지가 더없이 메스꺼운 강화도령은, 용포도 옥좌도 금침도 모다 싫었다. 모든 것이 환멸 속이었다. 논밭에 세워두던 허수아비의 처지가 저보다 나을 것이다.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나의 연인을 데리러 갈 것이다. 약조를 지킬 것이다. 이 몸이 갈 수 없다면, 꽃가마라도 보내련다. 고운 비단 치마저고리도 보내고, 꽃신도 보내고, 그렇게 만나 지면 손가락에 귀한 옥가락지도 한 쌍 끼워주련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고 궐에서 호강시켜 줄 것이다. 그리 작심하였다. 저를 믿고 의지하라던, 무엇이든 해주겠다던 영의정 김씨에게 부탁하면 봉이를 데려오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꼭 데려오시오. 아니, 모셔 오시오. 후궁 첩지를 내릴 것이오.”

“신분도 알 수 없는 천민 계집이라니, 천부당만부당한 분부십니다. 그 때문에 중전마마와의 합방을 차일피일 미루고 계신 것이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영상, 내가 딱 죽을 참이오. 그댈 위해 익선관을 쓰면 과인에게 뭐든 들어주신다 하지 않았소?”

조선의 왕으로 모셔두고는 저의 머리 위에서 노는 실세가 바로 이들이었다. 원범은 그를 묵과하는 대신 강화에서 저만을 오매불망 바라보고 있을 가여운 사람을 떠올렸다. 혼례 하자 약속하였지, 부부 되어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려니 생각하였지. 가짜 태양 노릇이야 얼마든지 할터이니 나의 봉이를 데려다 주오, 왕은 내내 소원하였다.

오라버니. 자비로운 임금님이 되셔서 해와 같이 빛나셔야 해요.

헌데 어인 음성만이 꿈자리를 맴도는 것이다. 야위고 초라한 봉이의 모습이 가슴에 짓이기는 듯 아프게 그려지고 그를 밤마다 흔들었다. 강화로 떠난 전령은 소식이 없소? 매일을 묻고 또 묻는 주상의 가슴이 새카맣게 썩어 들어가는 줄은 모르고, 임금보다 더 위에 서서 나라를 뒤흔드는 권세의 인물들이 고개만 강경히 저었다. 끝까지 모른 체를 할 셈인가, 진실은 멀리 가지 않았다. 왕을 위해 몰래 탐문에 나선 상선이 강화를 다녀오고 나선 눈물만 주룩 주룩 흘리니, 천민 처녀가 가여워서도 아니요 그저 무력한 윗전이 불쌍하여 흘리는 망측한 눈물이로다.

핏줄 하나 없이 천지간에 저밖에 모르던 가여운 나의 사람이, 드디어 기다리던 낭군을 만나리라 감격에 젖어 궐로 따라나서다 십 리도 밟지를 못하고 요절을 하였단다. 왕은 그 날서부터 온전한 정신으로 지내지 못하였다.

내가 봉이를 죽였다.

내가 죽인 것이다.

데리러 오겠노라 해놓고, 내가 그 아이에게 칼을 꽂았다.

지존은 용루도 함부로 비춰선 아니 된다지. 원범은 매일 밤을 그렇게 숨어 울었다. 보고 싶다. 가슴에 멍이 들도록 그립고 심장이 애가 타도록 네가 보고 싶어.

은애 하던 고운 이가 떠다 준 샘물 바가지 대신 왕의 손에는 이제 차가운 사기그릇이 들려 있었다. 언제나 다시 잠을 청해나 볼까, 그래야 그녀를 만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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